명품 브랜드 루이비통 vs 샤넬

명품 브랜드의 역사를 알아보고 자신의 브랜드를 역사로 만들어 보자!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 vs 샤넬

브랜드가 어떻게 명품이 되어 왔는지를 살펴본다면 충분히 우리 삶에 반영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작성해 본 칼럼이다. 재미로 보는 역사속 명품 거장들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나는 마인디스트 민혁이다.

오늘은 좀 새로운 장르의 얘기를 해볼까 한다. 그동안의 많은 성인남녀들의 허세의 상징이 되어 왔던 명품 브랜드 중 루이비통과 샤넬의 역사를 조사해본 내용이다. 

그리고 일상의 각 영역마다 명품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간다. 과연 어떻게 명품이라는 호칭을 달게 되었던 것인지 개인적으로 너무 궁금했다. 그 역사를 알게 된다면 우리도 충분히 그들의 뒤를 따라 또 하나의 명품을 개척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고 기대를 해보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지금부터 그들의 역사속으로 들어가 보자.



프랑스를 대표하는 브랜드 "루이비통"(LOUIS VUITTON)이다.

원이름은 창업자의 이름을 딴 Louis Vuitton Malletier(루이비통 말레티에)다. 루이비통 말레티에는 1821년에 프랑스의 동부 앙쉐라는 작은 마을의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말레티에는 아버지가 재혼을 하면서 집을 나와서 온갖 잡일을 하면서 2년이 걸려 파리에 입성을 하게 된다. 파리에서 처음으로 한 일이 상자를 만드는 공방에서의 일이었다. 

이때 손기술을 인정받아서 나폴레옹 3세의 유제니 황후의 가방을 만드는 패커가 된다.

패커란? 어떤 기술을 가지고 전담으로 물품을 만들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이후에 유제니 황후의 후원으로 자기 이름을 건 가게를 시작하게 되는데 1854년 루이비통하고 그 아들인 조르지오 비통이 텀블러 자물쇠라는 지금도 루이비통의 시그니처 디자인을 고안해 내게 된다.


처음에는 가방보다 여행용 트렁크에 이 디자인을 적용했다고 한다. 루이비통하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모노그램 패턴하고 다미에 패턴이다.


모노그램 패턴은 L과 V 알파벳, 꽃을 활용한 디자인이고 다미에 패턴은 체스판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되었다고 한다.

헤밍웨이나 오드리 헵번처럼 당시에는 유명인들, 지금은 셀럽들의 모든 가방을 제작하면서 가방 브랜드를 대표하는 명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가방만 만들었던 루이비통 브랜드는 1997년 첫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크 제이콥스"를 영입하면서 의상(패션)비즈니스까지 겸비한 토탈 코디네이터 브랜드 루이비통이 된다.



그리고 "무라카미 다카시"라는 일본의 현대미술가를 디자이너로 영입하였고 하얀 가방에 멀티컬러 모노그램을 콜라보레이션을하여 루이비통의 디자인을 본격적으로 다각화에 시도하였다.



다음은 전 세계 여성들이 열광하는 명품 브랜드 샤넬의 스토리를 소개한다. 

창업자는 "가브리엘 샤넬"이며 샤넬은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보육원에서 자라면서 거기서 직업교육으로 바느질을 배웠고 이후 보육원에서 나와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코코(CoCo)라는 별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샤넬 로고는 여기 CoCo에서 따왔다는 설과 Chanel에서 C를 가져왔다는 말이 교차하면서 전해진다.

본격적으로 1909년 샤넬은 모자 가게를 여는 걸로 브랜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에 저지라고 하면 남성용 속옷이었는데 샤넬은 그걸 여성의 외의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웨터, 세일러 셔츠, 다리가 보이는 스커트 디자인 등 매해 새로운 패션 라인을 발표하면서 패션쇼를 열게 된다.



샤넬 이전에는 패션쇼를 할 때 의상에 이름을 붙였었지만 그 이름을 떼고, 고객들이 패션쇼를 보고 오더를 할 수 있게끔 번호를 들고 나오게 처음 패션쇼에 도입한 게 바로 샤넬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검은 의상들은 여성의 상복에나 입는 옷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무나 입는 터틀넥을 그 당시에 만들어낸 것도 샤넬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즐겨 입는 옷들이 이때 처음 만들어져서 현재까지도 유행하고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명품 브랜드답게 완전히 혁신적인 디자인을 꾸준히 많이 만들어 냈다.

또한 독특한 점은 인조 진주와 크리스탈을 만들어내서 패션에 최초 도입을 했고 새로운 풍조를 창조해낸 디자이너가 바로 샤넬이기도 했다. 



사설이지만 이토록 성공한 패션 디자이너 샤넬이 프랑스 국민들로부터는 크게 사랑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샤넬이 2차 세계대전 중에 프랑스의 적국인 독일군 장교와 연애를 해서였다고 하니 참 웃긴 해프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위스에서 말년을 보내면서 1971년에 유명을 달리한 샤넬! 사후에 파리의 유명 인사들 묘지에 묻히는 걸 프랑스 사람들이 반대해서 스위스 로잔에 샤넬의 유택이 조성이 되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때 샤넬이 한 행위에 대해서 프랑스 사람들은 끝내 용서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품이 된 샤넬이지만 그 모든 것을 이루어낸 코코 샤넬은 프랑스 땅이 아닌 지금 현재 스위스에 묻혀 있다고 한다. 정말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최고의 시작과 정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과정에는 누구나 그래왔던 힘듦의 터널이 존재한다. 인간은 명품을 만들고 그 명품은 인간들로 인해서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마지막엔 명품을 만들었던 사람을 우리는 역사속에 간직한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드라마다. 한번뿐인 인생, 그 속의 누구나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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